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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고희경 (1873년)
         [[한일 병합 조약]] 체결 후에는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었고, 고희경은 [[이왕직]] 사무관으로 계속 왕실 관련 업무를 맡았다. 이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가족 사진에 등장하기도 한다.
  • 김성수 (1891년)
         [[1926년]] [[6월 10일]]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[[국장 (장례)|국장]] 인산일에 중앙중학교 체육교사 [[조철호]](趙喆鎬)가 학생들을 이끌고 단성사 근처로 집결, 가두시위를 벌였다. 순종의 [[영여]]가 창덕궁을 출발, 종로를 통과할 때 한 학생이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격무늘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, 주위에 정렬한 상복입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. 만세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중 100여명이 중앙중학교 학생이었다.
         [[1926년]] [[6월 11일]]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[[6·10 만세 운동]]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[[조선총독부]]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. 6월말 [[6.10 만세운동]] 당시 [[중앙학교]]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, 김성수는 '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'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.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. [[1929년]] 3월 [[경성방직주식회사]] 고문이 되었다.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,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[[광주 학생 항일 운동]]이 발생했다.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,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.
  • 민겸호
         *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
  • 박규수
         1921년 3월 31일 [[일제 강점기]]였지만 [[이왕직]](李王職) 등으로 명맥은 유지하던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명으로 [[신응조]](申應朝), [[이돈우]](李敦宇), [[민영환]](閔泳煥) 등과 [[대한제국 고종|고종]]의 묘정에 배향됐다.
  • 박명언(독립운동가)
          | 군주 = [[대한제국 고종|고종 이형]]<br />[[대한제국 순종|순종 이척]]
          | 섭정 = [[대한제국 순종|황태자 이척]](前) <br /> [[의친왕|의친왕 이강]](前)
  • 박정양
         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 때 문익(文翼)의 시호가 내려졌다.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[[1980년]]대부터 재조명되기 시작하였고, [[1984년]]에는 그의 문집을 한글로 간행한 박정양 전집 5권이 간행되었다.
  • 사시 (시호)
         *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 황후(계후) 윤씨 : [[순정효황후]] - 이는 사시이지만 생전 지위가 황후였던 점이 감안되어 [[대한민국]] 국사학계의 일부는 이 시호를 인정하고 있다.
  • 소 (시호)
         * [[대한 제국]] 소제([[대한제국 순종]])
  • 송학선
         1926년 [[4월 26일]]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이 사망하자 빈소가 마련된 [[창덕궁]] 앞에서는 호곡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모여 들었다. 고종은 망국의 상징이었고 일본인들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비통함이 더욱 컸다. [[금호문]](金虎門)은 창덕궁의 서남문으로 빈소의 출입구였으며, 송학선은 [[조선총독부]]의 고관들이 이 곳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 [[사이토 마코토]] 총독을 처단하기로 마음 먹었다.
  • 송학선(독립운동가)
         1926년 [[4월 26일]]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이 사망하자 빈소가 마련된 [[창덕궁]] 앞에서는 호곡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모여 들었다. 고종은 망국의 상징이었고 일본인들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비통함이 더욱 컸다. [[금호문]](金虎門)은 창덕궁의 서남문으로 빈소의 출입구였으며, 송학선은 [[조선총독부]]의 고관들이 이 곳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 [[사이토 마코토]] 총독을 처단하기로 마음 먹었다.
  • 순헌황귀비
         [[명성황후]]에 의해 대궐에서 쫓겨날 당시 엄귀비는 [[상궁]]직을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게 하였으나 당시 대신 [[윤용선]]이 고종에게 간곡하게 말하여 서인만은 면하게 되었다.<ref name="ipsisi"/> 후에 엄귀비는 윤용선의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있다가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계비를 간택할 때 윤용선의 손녀를 추천하였다. [[1895년]] [[10월 8일]] [[을미사변]] 이후 다시 입궐하여 [[대한제국 고종|고종]]의 총애를 받았다. [[아관파천]] 때는 고종을 모시고 [[러시아]]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하였으며, [[1897년]] 황자 은(垠, [[의민태자]])을 낳고 이틀 후 정식으로 귀인에 봉작되었다. 이후 순빈, 순비로 차례로 진봉되었고, 나중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.
         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에게 아들이 없었고 그가 심하게 병약했다는 점 때문에 엄귀비는 자신의 아들 [[의민태자|황자 은]]을 [[황태자]]로 올릴 계획을 세운다. 그러나 이를 안 [[의친왕]]이 반발하면서 [[의친왕]]과도 갈등하게 된다.
         1907년 [[8월 17일]] [[태황제]] [[대한제국 고종|고종]]은 후사가 없는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황태자로 [[영친왕 이은]]을 결정하였다.<ref>국사편찬위원회, 《고종시대사 6》 (국사편찬위원회, 1969) 635</ref><ref>국사편찬위원회, 《고종시대사 6》 (국사편찬위원회, 1969) 641</ref>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[[이준용 (1870년)|이준용]]과<ref name="ohsy333">오영섭 《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(1)》(오영섭 저, 한영희 발행, 2007.4, 경인문화사) 333쪽</ref>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[[이완용]]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.<ref name="ohsy334">오영섭 《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(1)》(오영섭 저, 한영희 발행, 2007.4, 경인문화사) 334쪽</ref>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[[이준용 (1870년)|이준용]]과 이강은 졸지에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동생이자 [[황태자]]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.<ref name="ohsy334"/>
         아들 [[의민태자|영친왕]]을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태자로 만드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[[의민태자|영친왕]]은 [[이토 히로부미]]가 자신이 [[황태자]] 사부(師父)라는 명목 하에 [[일본]]으로 인질로 데려갔다. 아들 [[영친왕]]이 [[일본]]의 [[사관학교]]에서 고된 훈련을 받는 도중 점심을 주먹밥으로 먹는 장면을 촬영한 필름을 보게 되었는데, 이를 보고 애통해하다가 먹던 떡이 급체하기도 했다 한다.
         사망 후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에게 [[사시]]격인 '순헌'이란 시호를 받았다.
  • 신응희
         [[1907년]](광무 10년) [[6월]] [[대한제국]]으로 환국, 바로 [[중추원 (대한제국)|중추원]]부찬의(中樞院副贊議)에 임명되었다가,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 즉위 후 [[육군]][[부령]]에 임명되었다. [[9월 19일]] [[육군]][[부령]]에서 면직되고, [[육군]][[정령]]에 임명되었다가 [[1907년]](융희 1년) [[10월]] 정령으로 예편하고 [[중추원 (대한제국)|중추원]]부찬의(中樞院副贊議)에 임명되었다. [[11월 10일]] 다시 중추원부찬의에 임명되고 [[주임관]]2등(奏任官二等)에 서임되었다. 그러나 그해 [[12월 20일]] 의원면직하였다.
  • 심상학
         '''심상학'''(沈相學, [[1830년]]/[[1845년]] ~ [[1890년]] [[5월 10일]])은 [[조선]] 말기의 문신, 관료이자 외교관이다. [[승문원]]과 [[홍문관]] 등에 근무할 때 겸직으로 [[세자시강원]]설서(世子侍講院說書)를 임명되어 [[대한제국 순종|세자 척]](뒷날의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을 가르쳤다. [[순원왕후]]의 외종손이고<ref>순원왕후의 외삼촌 심능적(沈能迪)이 심상학의 증조부, 심영의 5대조가 된다.</ref>, [[연극]][[배우]] 겸 [[영화]][[배우]], 탤런트인 [[심영 (1910년)|심영]](沈影)의 할아버지이다. 그러나 [[심영 (1910년)|심영]]의 아버지 심완섭은 심상학의 서자였다. 자(字)는 덕초(德初), 본관은 [[청송 심씨|청송]](靑松)이다.
         [[1875년]] [[규장각]]에 들었고 바로 직각 권점(直閣圈點)을 받았지만 직각이 되지는 못하였다. 이듬해 본관록과 도당록(都堂錄)에 올랐다. 이후 동벽(東壁)에 올라 [[홍문관]]과 [[승정원]] 승지 등을 거쳐 [[이조]][[참의]], [[예조]][[참의]] 등을 역임했다. 또한 겸직으로 [[세자시강원]]설서(世子侍講院說書)를 겸하여 [[대한제국 순종|세자 척]](후일의 순종)에게 [[성리학]] 학문을 보도하였다.
  • 여흥부대부인
         ******* 손자 : [[대한제국 순종|순종 이척]](純宗 李坧)
         [[분류:1818년 태어남]][[분류:1898년 죽음]][[분류:조선의 왕족]][[분류:대한제국의 황족]][[분류:부대부인]][[분류:운현궁]][[분류:불교 이탈자]][[분류:조선의 로마 가톨릭교도]][[분류:여흥 민씨]][[분류:서울특별시 출신]][[분류:병사한 사람]][[분류:대한제국 고종]][[분류:대한제국 순종]][[분류:의친왕]][[분류:명성황후]]
  • 윤휴
         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 때 가서 복권되었지만 [[1910년]](융희 4년) [[대한제국]]이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그는 언급이 금기시되고 기피되었다. [[1873년]](고종 10)에 가서 [[남인]]에 의해 [[이현일]], 윤휴, [[한효순]], [[목내선]], [[정인홍]], [[정도전]]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. 이에 면암 [[최익현]](崔益鉉)과 중암 [[김평묵]](金平黙)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. 그러나 [[정도전]], [[이현일]], 윤휴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자 면암 [[최익현]](崔益鉉)과 [[김평묵]]은 이를 막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였다.
  • 의친왕
         | 섭정2 = [[김홍집 (1842년)|김홍집]](1894.06.25.~1894.07.19.)<br />[[이준용 (1870년)|영선군 이준]](1894.07.19.~1894.07.27.)<br/>[[대한제국 순종|왕세자 이척]](1894.08.28.~1894.09.08.)<br/>[[박정양]](1895.06.01.~1895.07.01.)<br/> [[김홍집 (1842년)|김홍집]](1895.12.17.~1896.02.11.) <br/> [[대한제국 순종|왕태자 이척]](1896.07.25.~1896.12.12.)
         | 군주3 = [[대한제국 고종|고종]]<br />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
         | 섭정3 = [[윤용선]](1901.12.19.~1902.01.23.) <br/> [[이근명 (1840년)|이근명]](1904.12.28.~1905.01.15.)<br/>[[대한제국 순종|황태자 이척]](1906.01.01.~1906.01.07.)<br/>[[대한제국 순종|황태자 이척]](1906.02.08.~1906.03.25.)<br/> [[대한제국 순종|황태자 이척]](1906.10.12.~1906.10.20.)<br/>[[대한제국 순종|황태자 이척]](1907.01.21.~1907.07.19.)
         | 작위4 = [[대한제국 순종|순종 황제]] [[대리청정]](純宗 皇帝 代理聽政)
         | 전임자4 = [[대한제국 순종|황태자 이척]] (前 고종 황제 대리청정)
         | 군주4 =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
         | 군주5 = [[대한제국 고종|대한제국 조선 황조 이태왕 이형]]<br />[[대한제국 순종|대한제국 조선 황조 이왕 이척]]
         | 친인척 = [[김사준]](장인)<br/>[[대한제국 순종|순종 이척]](이복 형) <br/> [[의민태자|의민태제 영친왕 이은]](이복 남동생) <br/> [[덕혜옹주|덕혜옹주 이덕혜]](이복 누이동생)
          | 섭정 = [[김홍집 (1842년)|김홍집]](1894.06.25.~1894.07.19.)<br />[[이준용 (1870년)|영선군 이준]](1894.07.19.~1894.07.27.)<br/>[[대한제국 순종|왕세자 이척]](1894.08.28.~1894.09.08.)
          | 형제 = [[대한제국 순종|순종 이척]](이복 형) <br/> [[의민태자|의민태제 영친왕 이은]](이복 남동생) <br/> [[덕혜옹주|덕혜옹주 이덕혜]](이복 누이동생)
         [[1905년]], [[미국]]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[[대한제국 육군]] [[2성 장군|부장]]이 되었다. [[1906년]] 7월 12일 의친왕 이강은 [[대한적십자사]] 총재에 취임하였으며,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(金尺大勳章)을 수여받았다. 이후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이 된 [[순헌황귀비]]의 견제를 받았다. 황자 서열로는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다음 서열이었으나 순헌황귀비의 견제와 [[일본]]의 영향 등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.
         [[1907년]] 부황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했다. 이때에도 그는 황태자 책봉의 기회를 박탈되었다. 이복 적형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이 즉위한 직후 1907년 7월 27일에서 1907년 8월 7일까지 이복 형 [[대한제국 순종|순종 황제]]의 [[대리청정]]을 잠시 맡았지만 여전히 황위계승 순위에서 서서히 멀어졌고 1907년 [[8월 7일]]을 기하여 [[대한제국 고종|태황제 고종]]은 후사가 없는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황태자로 [[의민태자|영친왕 이은]]을 결정하였다.<ref>국사편찬위원회, 《고종시대사 6》 (국사편찬위원회, 1969) 635</ref><ref>국사편찬위원회, 《고종시대사 6》 (국사편찬위원회, 1969) 641</ref>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[[이준용 (1870년)|이준용]]과<ref name="ohsy333">오영섭 《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(1)》(오영섭 저, 한영희 발행, 2007.4, 경인문화사) 333쪽</ref> 이강을 견제하려는 [[순헌황귀비]]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[[이완용]]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.<ref name="ohsy334">오영섭 《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(1)》(오영섭 저, 한영희 발행, 2007.4, 경인문화사) 334쪽</ref>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[[이준용 (1870년)|이준용]]과 이강은 졸지에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의 동생이자 [[황태자]]의 형이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.<ref name="ohsy334"/>
         ** 형 [[대한제국|대한]] [[순종 효황제|순종 <sup>효</sup>황제]](大韓 純宗 皇帝) [[대한제국 순종|융희황제 이척]](隆熙皇帝 李坧) - [[대한제국|대한]] 제'''2'''대 황제
         *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
         |전임자 = [[대한제국 순종|황태자 척]]
  • 이건 (대한제국 황족)
         1910년 [[한일병합]] 당시 공포된 [[메이지 천황]]의 조서에 따라 고종,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, [[순정효황후]], [[영친왕]], 의친왕, 의친왕비, [[흥친왕]], 흥친왕비 등 총 8명만 [[왕공족]]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았고, 나머지 왕실 구성원들은 공식적으로 이에 포함되지 못하였다. 이건의 이복동생 [[이우]](李鍝)가 1917년에 [[이준용 (1870년)|이준용]]의 양자로 들어가 공위를 계승받으면서 동생은 왕공족인데 형은 왕공족이 아닌 상황이 발생하였다.<ref>{{서적 인용|저자=김기훈|제목=일제하 재일 왕공족의 형성배경과 관리체제|연도=2009|출판사=부경대 대학원 학위논문(석사)|쪽=36 ~ 37}}</ref> 이건은 일본 유학 이후 임의적으로 ‘공자’(公子)라는 칭호를 받았고, 1926년에 《왕공가궤범》(王公家軌範)이 공포되고 난 이후에야 왕공족으로 정식 인정받게 되면서 그때까지 한정된 범위의 왕공족에게만 사용되던 ‘전하’(殿下)의 경칭을 받게되었다.<ref>김기훈, 위의 책, 72쪽.</ref><ref>{{뉴스 인용|제목=왕공궤범 제정과 덕혜옹주, 이건공자에게 전하의 경칭을 사용|url=http://gonews.kinds.or.kr/OLD_NEWS_IMG3/MIN/MIN19260822u00_01.pdf|출판사=매일신보|날짜=1926-08-22|확인날짜=2012-06-16|보존url=https://web.archive.org/web/20160306141545/http://gonews.kinds.or.kr/OLD_NEWS_IMG3/MIN/MIN19260822u00_01.pdf|보존날짜=2016-03-06|깨진링크=예}}</ref>
         1916년 6월에 경성유치원을 졸업하고, 1917년 4월 6일에 일출소학교에 입학하였다.<ref>{{뉴스 인용|제목=총애를 일신에 종하고, 이강공 장자 용길아지기, 지금은 일출학교에 통학 통명하고 활발한 그 천성|url=http://gonews.kinds.or.kr/OLD_NEWS_IMG3/MIN/MIN19170408u00_03.pdf|출판사=매일신보|날짜=1917-04-08|확인날짜=2012-06-16|보존url=https://web.archive.org/web/20160307151338/http://gonews.kinds.or.kr/OLD_NEWS_IMG3/MIN/MIN19170408u00_03.pdf|보존날짜=2016-03-07|깨진링크=예}}</ref> 1921년에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[[학교법인 가쿠슈인|학습원]] 초등과에 입학하였고, 1923년 3월에 초등과를 졸업하였다.<ref name="인사여신록">{{서적 인용|언어 =ja|저자=人事興信所|제목=人事興信録 第13版|연도=1941|출판사=人事興信所|url=http://dl.ndl.go.jp/info:ndljp/pid/1070509/53}}</ref> 같은 해 4월에 [[육군유년학교 (일본)|육군유년학교]]에 입학하였다. 한일병합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하여 1926년 12월 1일에 일본 황실령 제17호로 제정·공포되었던 《왕공가궤범》(王公家軌範) 제59조에 따르면 왕·왕세자·왕세손·공은 만18세에 달한 후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의무가 강제되었다.<ref name="왕공">{{웹 인용|url=http://law.go.kr/lsInfoP.do?lsiSeq=67698&chrClsCd=010202#0000|제목=왕공가궤범|저자=조선총독부황실령 제12호|출판사=국가법령정보센터|날짜=1941-07-10}}</ref> 1926년 4월에 [[일본 육군사관학교]] 제42기생으로 예과에 입교하였다. 1926년 4월 26일에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이 사망하자 장례식을 집행하는 종척집사(宗戚執事)로 임명되었고,<ref>{{웹 인용|url=http://sillok.history.go.kr/viewer/viewtype1.jsp?id=kzc_11904026_008&grp=&aid=&sid=890654&pos=4|제목=후작 윤택영을 총호원으로 임명하고 이해창, 이해승, 이윤용 등을 종척집사에 임명하다|저자=순종실록부록|출판사=국사편찬위원회|날짜=1926-04-26}}</ref> 5월 10일에 순종의 능을 천릉할 때에도 종척집사로 임명되었다.<ref>{{웹 인용|url=http://sillok.history.go.kr/viewer/viewtype1.jsp?id=kzc_11905010_002&grp=&aid=&sid=0&pos=5|제목=천릉할 때의 수빈원과 종척집사를 임명하다|저자=순종실록부록|출판사=국사편찬위원회|날짜=1926-05-10}}</ref>
  • 이관용 (황족)
         [[1907년]]에는 양아버지 [[이재선]]은 복권되고 완은군에 추증된다. 조선의 왕족들이 왕궁에 출입할때 함께 출입, 문안하는 등의 예우는 지속되었다. 1912년 양궁에 [[이재면|이희]], [[의친왕|이강]], [[이준용]] 등과 출입하였으며, [[1921년]]말에 부상을 당하여, 그해 [[12월 8일]]에는 부상 치료차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으로부터 60원을 하사받는다.
         *** 사촌 :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(純宗, [[1874년]] - [[1926년]])
         *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
  • 이민우 (1976년)
         |1990||MBC||[[조선왕조 오백년]] - [[대원군 (1990년 드라마)|대원군]]||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||
         |1990||MBC||[[조선왕조 오백년]] - [[대원군 (1990년 드라마)|대원군]]||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||
  • 이진우 (1969년)
         * [[1990년]] [[문화방송|MBC]] 《[[대원군 (1990년 드라마)|대원군]]》 ... [[대한제국 순종|순종 이척]] 역
  • 한창수
         외교 관계 쪽 관직을 맡으며 [[일본]]에 드나들면서 친일 세력과 가까워진 뒤, [[1910년]] [[한일 병합 조약]]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[[조선귀족|남작]] 작위를 받고 [[조선총독부 중추원]]의 고문에 임명되었다. 일제의 신임을 받아 [[대한제국 고종|고종]]과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 등 왕실을 전담하는 [[이왕직 장관]]도 역임했다.
  • 홍영식
         [[1894년]] [[갑오개혁]] 때 총리대신 [[김홍집]](金弘集), [[유길준]] 등의 거듭된 상주로 신원, 복권되었으나 [[김홍집 내각]]의 실각으로 추탈되었다가,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 때 [[증직|증]] 대광보국숭록대부 [[규장각]] [[대제학]]에 [[추증]]되고, 충민(忠愍)의 시호가 내려졌다.
  • 효 (시호)
         * [[조선]] 효황제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
  • 효순왕후
         [[1908년]] [[대한제국]]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 때 황후로 추존되어 '''효순소황후'''(孝純昭皇后)가 되었다.<ref>《조선왕조실록》 순종 2권, 1년(1908 무신 / 대한 융희(隆熙) 2년) 5월 11일(양력) 1번째기사
  • 흥친왕
         * [[대한제국 순종|순종]]
         [[분류:유교 신자|이희]][[분류:과거 급제자|이희]][[분류:대한제국의 황족]][[분류:대한제국의 부장]][[분류:대한제국의 친왕]][[분류:일본의 왕공족]][[분류:육군 장군]][[분류:일제 강점기의 관료]][[분류:한국의 귀족]][[분류:테러 피해자]][[분류:친일인명사전 수록자]][[분류: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]][[분류:전주 이씨]][[분류:서울특별시 출신 인물]][[분류:병사한 사람]][[분류: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]][[분류:운현궁]][[분류:대한제국 고종]][[분류:대한제국 순종]][[분류:영선군|영선군]][[분류:금척대훈장 수훈자]][[분류:서성대훈장 수훈자]][[분류:이화대훈장 수훈자]][[분류:19세기 한국 사람]][[분류:19세기 한국의 군주]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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